사상의 숲Vol.16

TM MAGAZINE 2026년 8월 11일

미카미 아키라의 『코끼리는 코가 길다』와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일본화란 주어의 무화

미카미 아키라는 1960년 『코끼리는 코가 길다』에서 일본어에 주어라는 개념은 필요 없다고 논했고 학계에서 묵살당했다. 니시다 기타로는 논문 「장소」에서 술어가 되어 주어가 되지 않는 것을 기체에 놓았다. 주어적인 것을 무화하고 장소에서 창조하는 것이 '일본화'의 정체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면서도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것. 이런 것에 뜻밖에 다음을 생각할 열쇠가 있는 듯합니다. 그것이 언어입니다.

영어는 주어가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본어는 주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도 평생을 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너무 당연해서 의식하지 못하지만, 언어의 구조적 차이는 단순한 문법의 버릇이 아니라 세계를 붙잡는 방식 자체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정경. 영어는 “It rains.”라고 합니다. 내리는 것은 비인데도 문장 맨 앞에는 “It”이라는, 누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주어를 두어야 합니다. 두지 않으면 문장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법학자는 이를 허사(虛辭)라고 부르지만, 요컨대 영어는 주어 없이는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주어를 날조해서라도 먼저 주어를 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어는 “비다(雨だ)“나 “내리기 시작했다(降ってきた)“로 충분합니다.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뿐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언어는 말할 수 있습니다.

“I love you.”를 “좋아해(好きだ)“라고 옮기면 주어와 목적어는 둘 다 사라집니다. 이에 대해 근대의 번역론은 일본어의 결함, 모호함이라고 재단해 왔습니다. 급기야 언어학자는 “일본어는 주어가 숨어 있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사라진 것도 숨겨진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이 아니라 ‘좋아함’이라는 상태가 두 사람 사이의 장소에 일어서 있습니다. 일본어는 사건을 장소로 붙잡고 관계 속에서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주어를 둘러싼 근대 아카데미즘의 문제는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결정적이었던 것은 전후에 발표된 한 권의 저작이었습니다. 그 저작을 쓴 사람이 언어학자 미카미 아키라(三上章, 1903-1971)입니다. 그는 1960년 『코끼리는 코가 길다(象は鼻が長い)』에서 일본어에 주어라는 개념은 필요 없다고 논하여 학계에서 묵살당했습니다.

왜 학회는 미카미 아키라를 무시하고 묵살했을까요. 이유는 참으로 단순합니다. 미카미 아키라가 유명 대학의 국어학 교수가 아니었고 학회에도 속해 있지 않았으며, 당시 오사카의 야오 고등여학교(현 야마모토 고등학교)의 수학 교사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텃밭을 어지럽히는 외부인이었기에 묵살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코가 길다”를 영어로 옮긴다면 어떻게 할까요. 먼저 주어를 ‘코끼리’와 ‘코’ 중 어느 하나로 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네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have형|Elephants have long trunks.(코끼리는 긴 코를 가지고 있다)
② 소유격형|An elephant’s trunk is long.(코끼리의 코는 길다)
③ 부분 한정형|The elephant is long in the trunk.(코끼리는 코에서 길다)
④ 좌방 전위형|Elephants — their trunks are long.(코끼리, 그건 코가 길다)

다시 말해 영어는 “코끼리는 코가 길다”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카미는 일본어의 ‘코끼리는’은 주어가 아니라 주제어, 곧 이야기가 놓이는 장(場)이며, 거기에 ‘코가 길다’라는 술어가 생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어처럼 주어가 술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위에 사건이 나타난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여기에 겹치는 사람이 전전(戰前) 일본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교토학파의 거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입니다. 백 년 전인 1926년에 발표한 논문 「장소(場所)」에서 니시다가 한 일은 단순하면서도 가혹했습니다. 서구의 논리를 밥상을 뒤엎듯 밑바닥에서부터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는 ‘주어가 되고 술어가 되지 않는 것’을 실재의 기체(基體)로 삼고, 거기서 철학을 비롯해 문자 그대로 ‘세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지금 국제적으로 ‘세계’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예외 없이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며, 대부분의 지역과 민족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것을 니시다는 뒤집어, ‘술어가 되고 주어가 되지 않는 것’, 곧 장소를 기체로 삼았습니다. 세계의 근간이 일본과 서구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증명은 전전의 시점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주어의 논리에서 술어의 논리로. 서양 철학의 심장을 멋지게 바꿔 놓은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일본화’라고 불려 온 기술의 정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일본인은 외래의 것을 받아들여 온 것이 아닙니다. 외래의 것에서 거추장스러운 주어적인 것을 무화(無化)하고, 그 위에서 술어 쪽(장소)에서 창조합니다. 이 전혀 새로운 창조를 일본인은 역사적으로 해 왔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타문화 수용이란, 이미 있는 무언가를 받아들여 소화함으로써 일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능력이 가장 절실한 형태로 필요한 것이 AI입니다.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말에는 지능이라는 주어를 인공적으로 만든다는 서구적 선언이 미국화된 형태로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은 반드시 에이전트, 곧 자율적인 주체를 만들려 합니다. 이 세상에 주어를 하나 더 늘리려 합니다. 그들의 지반(地盤)으로 보면 필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AI와 인간’이라는 이항 대립의 구도로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AI가 인간을 넘어선다거나, AI가 인류를 멸종시킨다거나, 싱귤래리티가 일어난다거나, 지금 이야기되는 AI론은 모두 서구의 주객 논리로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AI를 주어로 삼지 않는 길은 1밀리미터도 생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인이라면 AI를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생각이 생기하는 장소로 다루는 기술을 역사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AI가 주체적으로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AI와의 사이에 답이 일어서는’ 장소를 창조하는 것. 이른바 AI와 인간을 지리(支離)로 생각하지 않고, 불리(不離)에서 생각하는 것. 이것은 일본인만이 할 수 있는 AI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어가 둘이 되면 도달하는 곳은 지배 아니면 종속뿐입니다. 인간이 AI를 쓰는가, AI가 인간을 지배하는가. 지금의 논의는 모두 이 이원론 안쪽에 있습니다. 그러나 장소로 다룬다면 그 물음 자체가 사라집니다. AI에서 중국의 부상은 저에게 역사를 연상시킵니다.

유학, 도교, 불교 등은 한 번 중국이라는 매개를 거쳐 일본으로 흘러들었고 마침내 일본화되었습니다. 어쩌면 AI도 미국 AI가 아니라 중화 AI를 들이는 편이 일본인이 일본화하는 길을 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중국은 영어가 지배적이었던 OS를 중국어로 쓰는 기술을 확립했고, 홍콩이라는 비지(飛地)를 이용해 AI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주어를 가진 미국의 야망, 곧 엔비디아와 거대 데이터센터를 불필요하게 하는 차원에 이르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본이 반미로 기울어 중국과의 거리를 재고하려 한다면. AI는 일본인에 의해 전혀 새로운 존재로 창조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일본은 서양을 전환하지 못한 채 단순한 적과 아군의 미래로 쏟아져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중요한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상가 미쓰이 다카히로의 주간 에세이 Project 2049

영어로, 매주 금요일 오후 5시(일본 시간). 좋아요도 댓글도 순위도 없습니다. 에세이와 당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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