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쓰카미 계획 연구소Vol.16

TM MAGAZINE 2026년 8월 11일

삼과 닥나무는 인베(忌部)의 같은 행위였다|『고어습유』의 화폐(和幣)와 아와(安房)의 지명

삼과 닥나무는 식물로서는 별개다. 그런데 『고어습유』에서는 청화폐의 삼과 백화폐의 곡(穀)이 인베라는 같은 씨족의 손으로 운반된다. 벗기고, 바래고, 두드리고, 잇는다. 소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소재라는 개념이 없었다. 있었던 것은 섬유를 다루는 행위 그 자체다.

하나의 구멍을 계속 파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다른 구멍으로 나오는 일이 있습니다. 최근 이 경험이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작년 조사 주제 중 하나는 삼(麻)의 고대 일본사였습니다. 조몬의 새끼줄에서 다이조사이(大嘗祭)의 아라타에(麁妙)까지, 그것을 전파시킨 고대 씨족과 이야기되지 않는 바다를 이동한 사람들의 역사. 그런데 최근, 섬유 한 가닥을 더듬어 가듯 잠수하던 곳에서 화지(和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지점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화지를 다루는 이상 닥나무(楮, 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삼과 닥나무는 식물로서는 별개의 것입니다. 한쪽은 1년 만에 말라 죽는 풀, 한쪽은 줄기를 가진 나무. 근대 분류학의 선반에서는 이웃하지조차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옛 전승 속에서 이 둘은 같은 씨족의 손에 의해 옮겨지고 같은 신에게 이끌립니다.

그것이 인베(忌部)입니다. 그러나 인베 씨는 헤이안 시대에 접어들 무렵 이미 지난날의 실권을 잃고 역사의 무대 앞에서 물러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807년에 인베 마지막 당주 인베노 히로나리(斎部廣成)가 헤이제이 천황에게 바친 책이 『고어습유(古語拾遺)』입니다.

이 문헌에는 인베의 조상신 후토다마(フトタマ) 아래 기술의 신들이 묶이고, 아마테라스가 아메노이와야(天の石屋)에 숨어 들었을 때 일대 사업을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두 가지 화폐(和幣)입니다. 청화폐(靑和幣)와 백화폐(白和幣)라고 합니다.

청화폐가 삼이고 백화폐가 곡(穀)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도쿠시마 요시노가와 유역으로 움직인 아와 인베(阿波忌部)의 조상신 아메노히와시(アメノヒワシ)가 곡목(穀木, 닥나무를 가리킵니다)을 심게 하여 백화폐를 만들게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삼과 곡. 이 시점에 이미 둘은 하나의 직분 안에 있습니다.

후반에는 후토다마의 손자인 아메노토미(アメノトミ)가 아메노히와시의 손자들을 이끌고 비옥한 땅을 찾아 동쪽으로 향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동정(東征) 경로는 바다를 따르고 있으며, 바로 삼과 곡의 씨앗을 지니고 각지에 전하며 이동한 역사의 흔적입니다.

도쿠시마를 떠난 그들은 기이 반도를 돌아 이세 지방에 들어가고, 도카이를 거쳐 간토로 나아가, 마침내 어느 곳에 이릅니다. 그 새 땅에서는 심은 삼이 잘 무성했다 하여 그곳이 ‘후사(總)‘라 불리게 되었고, 아와에서 건너간 인베가 정착했다 하여 ‘아와(安房)‘라 불렸습니다. 지금의 지바현입니다.

다시 말해 보소(房總)의 지명은 도쿠시마의 삼에서 왔고, ‘아와’라는 소리가 고대인의 이동을 지명에 새겨 넣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삼을 파고 있다가 놀란 것은 이 한 점이었습니다. 식물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느새 지명 이야기가 되고, 씨족의 이동사가 되고, 신사의 제신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파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그 이어짐이 끝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어져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보였을 때는 이미 다른 곳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곡(穀), 곧 닥나무. 닥나무 껍질을 찢어 만드는 섬유를 옛말로 ‘木綿’이라 쓰고 ‘유(ゆう)‘라고 읽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면(綿)이 아닙니다. 인도에서 온 코튼이 일본에 자리 잡는 것은 훨씬 훗날입니다.

닥나무의 인피(靭皮) 섬유는 길고, 서로 얽히며, 놀랄 만큼 강합니다. 그렇기에 천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도쿠시마현 나카초(那賀町) 기토(木頭)에는 지금도 닥나무를 짠 다후(太布)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옛 지층을 전해 줍니다.

이 옛 지층에 새롭게 종이의 기술이 들어왔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스이코 18년(610년),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먹과 종이의 제법을 전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여기가 일본 제지의 기점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춰 설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은 분명 바다를 건너왔지만, 그 기술이 다루는 소재는 이미 이 땅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신사(神事)의 중심에 놓인 소재로서. 벗기고, 물에 헹구고, 두드리고, 섬유를 풀어 헤친다. 이 일련의 손의 행위를 인베는 이미 수백 년이나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이는 이물(異物)로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천의 또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천 년이 넘도록 고문서가 남는 것은 닥나무 섬유가 길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종이가 오기 전에 섬유를 다루는 행위가 일상에 이미 있었습니다. 이미 행위(기술)로서는 완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릇이 먼저 있던 곳에 물이 부어졌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삼과 닥나무를 ‘다른 소재’로 간주하는 것은 근대 이후 우리에게 달라붙은 나쁜 버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이누 연구의 일인자 지리 마시호(知里眞志保)는 예전의 아이누어에 ‘식물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없음을 밝혀냈습니다.

이 지리 마시호의 깨달음을 작년에 머릿속 한구석에 두고 조사를 계속하다 보니, 고대인은 ‘물건’을 동정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이름이 있었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식물의 어떤 부위를 일상의 행위 속에서 쓰고,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그 일련의 행위에야말로 이름이 붙었던 것입니다. 이번 주 「사상의 숲(思想の森)」에서 전한 주어 없는 경지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삼과 닥나무가 하나의 씨족에게 맡겨진 이유는 명쾌합니다. 벗기고, 헹구고, 두드리고, 잣는다. 행위로서 둘은 같습니다. 물론 차이는 있지만, 같은 기술을 소재에 맞춰 조정하는 고대인의 기술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차이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소재가 달랐던 것이 아니라 소재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있었던 것은 섬유를 다루는 행위 자체이며, 그 행위를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른 프로젝트에서 화지를 다룰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때 문득, 작년 조사의 식견이 ‘삼과 닥나무’라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것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상가 미쓰이 다카히로의 주간 에세이 Project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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