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숲Vol.15

TM MAGAZINE 2026년 8월 4일

하야시 라잔의 주자학과 고학파의 반동|문화가 일어나는 원천에는 반드시 사상이 일어난다

1605년, 만 나이로 스물셋의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새 시대 체제 철학을 떠받치는 주축으로 대발탁되었다. 그러나 막부도 번도 학문의 자유를 인정했고, 그 여백에서 고학파가 대두하며 겐로쿠 문화가 꽃핀다. 문화가 일어나는 원천에는 반드시 사상이 일어난다.

오랜 세월 이어 온 일본 탐구의 여정. 신화와 고대사, 그리고 이야기되지 않은 자들의 발자취에서 영성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형태를 이루지 못한 것들을 더듬어 왔습니다. 그 토양에서 지금 다음의 중요한 싹이 트기 시작했고, 저는 새로운 여정으로 옮겨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학의 한 갈래인 양명학(陽明學)입니다.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서 시작된 계보이지만, 양명학이라는 호칭은 일본 특유의 것이며 중국에서는 왕학(王學) 등으로 불립니다. 격동의 생애를 보낸 왕양명은 당시 체제 철학으로 칭송받던 주자학(朱子學)과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유학의 시작이 공자(孔子)의 말을 훗날 문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 간 끝에 문서화한 것이었듯, 왕양명의 삶의 방식도 문인들에 의해 훗날 문서화되었고, 이윽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깃듭니다.

왕양명이 세상을 떠난 1529년은 일본으로 말하면 전국 시대의 패권 다툼이 격화되기 전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태어나기 직전입니다.
이윽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올라 1603년에 에도 막부를 열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이미 고령이었던 이에야스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움을 알고, 도쿠가와 가문의 번영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며, 또 통치가 미래에 미치도록 궁리를 거듭합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는 이제까지 없던 체제 철학을 채택하고 막번 체제를 깔 것을 생각해, 한 인물에게 이야기를 꺼냅니다.

당대 굴지의 학자로 알려진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입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마흔을 넘긴 후지와라 세이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좋은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 제안을 사양합니다.
그 대신 자신의 문인 가운데 가장 기세가 있고 뛰어난 지성을 지녔으며 새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을 소개하는 것으로 매듭지었습니다. 이렇게 후지와라 세이카가 고른 사람이 한 젊은이였습니다.

그 이름은 하야시 라잔(林羅山).
세는나이로 스물셋이던 하야시 라잔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주선으로 1605년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합니다.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새 시대에 어울리는 비전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높이 산 이에야스는 즉석에서 중용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하야시 라잔은 불과 스무 살 초반에 새 시대의 체제 철학을 구축하고 떠받치는 주축으로 파격 발탁된 것입니다. 지금의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야시 라잔이 열심히 매진한 학파. 그것이 남송의 주희(朱熹)가 세운 주자학이었습니다. 이 주자학도 일본 고유의 호칭이며, 중국에서는 북송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합쳐 정주학(程朱學)이라 불립니다.
주자학은 송대의 통치 원리로, 왕양명이 살았던 명대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학파가 되었고, 중국 황조 쪽에서는 이미 통치에 가장 알맞은 체제 철학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전국 시대라는 다원적 세계의 패권 다툼을 거쳐 정점에 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눈여겨본 이유입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주자학을 소유한 하야시 라잔을 발탁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함으로써, 훗날 우리가 에도 시대라고 부르는 265년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야시 라잔이 소화한 주자학은 훗날 하야시 가의 주자학으로 대대로 하야시 가에 세습됩니다. 그 발단이 된 것이 1630년, 그가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에게서 우에노 시노부가오카의 땅을 하사받았을 때 연 사숙(私塾)이었습니다.
2년 뒤에는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의 출자로 공자묘의 선성전(先聖殿)을 세웁니다. 이 시점에서는 하야시 가의 사적인 서당과 사당에 지나지 않았고, 하야시 라잔 만년인 1657년 3월 2일부터 4일에 걸쳐 장서와 함께 메이레키 대화재(明曆の大火)로 불타 버립니다. 하야시 라잔은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 충격으로 병을 얻어, 불과 며칠 뒤인 7일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 사숙이 18세기가 끝나 갈 무렵 막부 직할의 관학 기관으로 개편되어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學問所)‘가 됩니다.

1690년,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가 이 유산을 간다 유시마로 옮겨 짓고 선성전을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오차노미즈에 남아 있는 유시마 성당(湯島聖堂)입니다.
이듬해에는 손자 하야시 호코(林鳳岡)가 대학두(大學頭)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 직책은 하야시 가의 세습이 됩니다. 동시에 쓰나요시는 유학자에게 승려 흉내를 그만두게 했고, 이때 유학자의 신분상 지위가 단숨에 끌어올려졌습니다.

다시 말해 하야시 라잔이 일으킨 학파는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눈 깜짝할 새에 스며들어, 초대 쇼군 이에야스 이래 대대로 도쿠가와 쇼군가의 막번 체제를 떠받치는 원리로 소중히 쓰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에도 시대의 재미가 담겨 있습니다. 막부도 번도 학문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막번의 요직에 오르는 가문의 자제가 주자학을 배우는 관습은 차츰 생겨났습니다. 한편 그 밖의 사람들에게 주자학을 강요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유학이라 하면 주자학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주자학을 배우는 것은 기초 교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제력은 없었습니다. 이 여백에 일본인 유학자들의 열기가 잇따라 들어차, 새로운 학파가 일어나는 생명력이 됩니다.

놓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에도 시대의 문화 황금기를 낳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문화가 일어나는 원천에는 반드시 사상이 일어난다. 이것이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설령 하야시 라잔이 체제 철학에 편입한 주자학이라 해도, 에도 초기에는 여백이 충분했고 중국 황조 같은 완성된 통치력은 없었습니다. 그 여백에 모습을 드러낸 흐름은 주자학에 대한 반동적 입장을 설하는 고학파(古學派)로 대두했습니다.

필두는 유학자이자 병학자로서 훗날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까지 이어지는 야마가류 병학과 고학파를 세운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고의학(古義學)을 제창한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고문사학(古文辭學)을 제창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이 세 사람입니다.
그들은 주자학을 비판하는 동시에 고학파의 다른 파도 비판하며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여백을 지니고 있던 사상의 흐름이 주자학에 대한 반동이라는 여지에서 틈새를 만들어 내고, 문화를 잇달아 탄생시킵니다.

이 결실이 겐로쿠 문화(1688~1704년)입니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문학,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카이,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조루리가 꽃핀 곳은 에도에서 떨어진 교토와 오사카의 가미가타(上方)였고, 게다가 조닌(町人)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주자학이라는 통치 원리에 맞는 체제 철학이 분명 막번 체제의 기초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풍요로운 여백과 반항 정신을 낳았고, 비무사 계급이 의기양양하게 대두했습니다. 주자학을 비판하는 강렬한 고학파 사상의 세례를 받아, 서쪽의 조닌들은 문화로 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흐름이 어떤 열기를 띠고 있었는가. 그것은 무사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고향인 호쿠리쿠에서 교토로 옮겨 왔을 때 조닌의 열기에 감격한 젊은 지카마쓰 몬자에몬이 칼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 붓을 쥐고 가부키·조루리의 세계에 몸을 던졌다는 일화만으로 충분합니다. 칼에서 붓으로. 이것이 새 시대의 상징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시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원체험이라 부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감격이 강렬한 원체험이 되어 자신의 생애를 크게 움직입니다.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주자학에 반한 하야시 라잔도, 주자학에 반항한 고학파 유학자도, 지카마쓰 몬자에몬도, 그들은 같은 시대에 저마다 감격이라는 원체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원체험이 잇달아 새로운 길을 열고, 때로 격렬하게 대립하며, 점점 여백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시대에는 훗날 린파(琳派)라 불리게 되는 오가타 고린(尾形光琳)도 등장했고, 나아가 이토 자쿠추(伊藤若冲)로 이어지는 문화가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격렬한 열광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에도 시대의 도읍.
그러나 그 열광의 소용돌이에서 약간 거리를 둔 곳에서 또 하나의 놓칠 수 없는 흐름이 이미 태어나 있었습니다. 중심이 아닌 절묘한 거리에서 태어난 어떤 학파는 훗날 에도 시대 그 자체를 일신하고, 이윽고 막번 체제를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흐름의 이름이 양명학.
그리고 일본 양명학의 시조 나카에 도주(中江藤樹).
에도도 아니고 가미가타도 아닌 절묘한 거리가 있는 시가현 다카시마에서 태어난 나카에 도주가, 문자 그대로 그 뒤의 일본을 변혁해 가게 된 것입니다.

오미 성인(近江聖人)으로서 지금도 숭앙받는 나카에 도주.
양명학을 둘러싼 저의 여정도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사상가 미쓰이 다카히로의 주간 에세이 Project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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