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 MAGAZINE 2026년 8월 11일
ATG는 왜 끝났는가|전액 출자로 ATG는 ATG가 아니게 되었다
1974년 아트시어터 신주쿠 문화는 그 역할을 마쳤고 ATG는 70년대 내내 후퇴해 간다. 1979년 새 사장 사사키 시로는 돈이 없으면 ATG가 전액 내겠다고 선언했다. 전액을 내는 쪽이 된 순간 ATG는 한낱 제작사가 된다. 남긴 것은 존재하는 방식 쪽이다.
문화가 끝날 때, 대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1974년, ATG는 두 편의 걸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데라야마 슈지(寺山修司)의 『시골에서 죽다(田園に死す)』와 구로키 가즈오(黒木和雄)의 『료마 암살(竜馬暗殺)』. ATG 방식의 정점이자 동시에 한 시대의 끝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ATG의 거점, 아니 시대의 거점이었던 아트 시어터 신주쿠 문화가 그 역할을 마칩니다. 1962년 개관으로부터 12년. 총지배인 구즈이 긴시로(葛井欣士郞)가 사임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유는 극장이 세상에 묻는 곳에서 일반 상업 영화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 ATG는 해외 예술 영화의 배급을 중단합니다.
수입하고, 키우고, 만든다. 그 첫 번째가 조용히 빠진 것입니다.
왜 열기가 식었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물음을 안은 관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첫 회에서 60년대를 시작한 것은 거대한 패배감이라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그 계절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탄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붕괴였습니다. ATG가 끝나는 그해에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1972년의 연합적군입니다. 산악 베이스에서 ‘총괄(總括)‘이라는 이름의 동지 살해와 아사마 산장 사건이 터졌습니다. 텔레비전은 하루 종일 그것을 비추었고 일본 전체가 보았습니다. 이 순간, 정치로 세계를 바꾸지 못했다는 패배 위에, 바꾸려 했던 자들이 동료를 죽였다는 무거운 사실이 겹쳐진 것입니다.
게다가 이듬해 1973년에 오일 쇼크. 고도 성장이 끝나고 거리의 공기가 일변합니다. 사람은 왜 죽는가. 나란 무엇인가. 그 물음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시라케(しらけ, 흥이 깨짐)‘라는 말이 세대의 이름이 되어 가는 것은 이 몇 년간입니다.
물음을 안은 젊은이가 거리에서 사라지면 그 물음에 응하는 영화관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물음 자체를 생성하는 첨예하고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품은 필요성을 잃습니다. 실제로 ATG의 쇠퇴는 이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신주쿠 문화가 사라진 같은 해 1974년 2월 12일. 진보초의 이와나미 홀(岩波ホール)에서 하나의 상영 운동이 시작됩니다. 여기에 관여한 사람도 가와키타 가시코(川喜多かしこ)였습니다. 그녀가 총지배인 다카노 에쓰코(高野悅子)와 함께 세운 ‘에키프 드 시네마(エキプ・ド・シネマ)‘가 탄생했고, 첫 상영작으로 인도 사티야지트 레이(サタジット・レイ)의 『나무의 노래(大樹のうた)』가 상영되었습니다.
불은 신주쿠에서 진보초로 옮겨 간 것입니다.
이 운동이 훗날 ‘미니 시어터’라 불리는 원류가 됩니다. 1981년에는 신주쿠에 시네마 스퀘어 도큐가 문을 열고, 이듬해 유로스페이스, 그 이듬해 시네 비방 롯폰기가 개업했습니다. 80년대 도쿄라는 호경기에 들뜬 시기에 작은 영화관이 잇달아 생겨났습니다. 가와키타 가시코라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곳에서 일본의 영화 문화를 떠받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ATG는 70년대를 거치며 조금씩 후퇴해 갑니다. 비평가에게 절찬받아도 관객이 들지 않는 작품이 있었고, 가맹관은 줄어들고 경영은 어려워지기만 했습니다. 70년대 전반에는 당시의 포르노 붐에 편승하는 형태로, 사상을 얽은 짓소지 아키오(実相寺昭雄)의 『무상(無常)』 『만다라(曼陀羅)』, 와카마쓰 고지(若松孝二)의 『천사의 황홀(天使の恍惚)』 같은 이른바 예술 포르노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79년, 창립 이래의 사장 이세키 다네오(井関種雄)가 퇴임하고 사사키 시로(佐々木史朗)가 뒤를 잇습니다.
여기서 새 사장은 획기적인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감독 쪽 부담은 50%든 10%든 좋고, 돈이 없으면 ATG가 전액 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제작비도 3천만 엔에서 3천5백만 엔으로 올렸습니다. 언뜻 보면 만드는 이에게 다정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ATG가 ATG가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ATG의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제2조는 선의만으로 성립한 것이 아닙니다. 만드는 이가 절반을 내고 있기에 참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나 오카모토 기하치(岡本喜八)가 집을 저당 잡혀 영화를 계속 만들었듯, 만드는 쪽은 목숨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 대등함이야말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적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전액을 내는 쪽이 된 순간 ATG는 그저 제작 회사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음 싹이 자란 것도 사실입니다. 사사키 체제의 ATG는 자주 영화와 로망 포르노 출신의 젊은이를 적극 기용했습니다. 오모리 가즈키(大森一樹)의 『히포크라테스들(ヒポクラテスたち)』(1980년),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의 『전학생(転校生)』(1982년), 그리고 모리타 요시미쓰(森田芳光)의 『가족 게임(家族ゲーム)』(1983년)이라는 쟁쟁한 명감독이 등장했습니다.
ATG의 작풍이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ATG의 발명이 업계의 상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1977년 피아(ぴあ)가 자주 제작 영화전을 시작했습니다(훗날의 PFF). 1979년에는 도에이(東映)가 사외 감독에게 문호를 열고 제작비는 절반씩 부담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저예산으로 젊은이에게 첫 작품을 찍게 한다. ATG만 하던 일을 대기업이 베껴서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운동은 져서 끝난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이기고, 흡수되어 끝나는 일도 있습니다. ATG의 말년은 그런 끝남이었습니다. 문화가 상업적으로 흡수되고 소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1992년, 신도 가네토(新藤兼人)의 『보쿠토 기단(濹東綺譚)』. 이것이 ATG의 마지막 작품이 됩니다. 이후 회사는 휴면 상태로 26년을 보내고, 2018년 11월 1일 도호(東宝)에 흡수 합병되어 사라졌습니다. 그사이인 1993년 가와키타 가시코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ATG는 무엇을 남겼을까요.
사람을 남겼습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마쓰모토 도시오(松本俊夫), 요시다 기주(吉田喜重), 하세가와 가즈히코(長谷川和彦), 모리타 요시미쓰. 그들이 그 장소를 거쳐 갔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 영화의 골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말. 상영관에서만 팔았던 잡지 『아트 시어터』. 완전한 시나리오와 평론을 실은 그 소책자가 영화를 보고 소비하는 관객을 읽고, 생각하고, 논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그 너머에서 영화를 만드는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무엇보다 구조. 돈은 절반이면 된다. 다만 일절 입을 대지 않는다. 그 대신 발표할 장소는 반드시 마련한다. 풍부한 예산도 세련된 인재 발굴 시스템도 아닙니다. 만드는 이가 자기 몫의 절반을 걸고, 어른이 말없이 장소를 내어 준다. 그것만으로 일본 영화는 그 높이까지 갔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누구의 손에나 있고 발표할 장소는 무한히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TG를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 결정적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ATG가 남긴 참된 유산은 여전히 강렬하고 첨예한 물음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신주쿠 3초메, 이세탄 옆. 문화는 작은 곳에서 태어나 조용히 끝납니다. 한 시대를 이룬 건물은 이미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갈 곳 없는 분노를 안은 젊은이와 어른이 공범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유하는 작품을 제공하고, 만들려는 의욕을 높이고, 돈을 절반 내고, 입을 대지 않고, 장소를 가진다. 본 사람은 사유하는 사람이 되고 만드는 존재가 됩니다. 그 연쇄야말로 일본 문화입니다. ATG가 남긴 것은 영화가 아니라 아마도 존재 방식 쪽입니다.
오늘날의 크리에이티비티는 과연 이 정신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 역사조차 모른 채 크리에이티브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구즈이 긴시로는 어떤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한마디를.
“나는 말이지, 아트 시어터의 관객에게서 다음 예술가가 태어나는 게 꿈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