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 MAGAZINE 2026년 7월 14일
요시다가와 시라카와가의 신직 면허 체계를 무너뜨린 히라타 아쓰타네의 복고신도
에도 시대에 신직에게 면허를 발급할 수 있는 가문은 요시다가와 시라카와가, 둘뿐이었다. 에도의 '신도'란 교의 이전에 면허라는 통제의 체계였다. 히라타 아쓰타네는 신도를 하나의 우주론으로 확장하고 '복고'라는 한 마디로 두 가문의 패권을 무너뜨렸다.
사회가 불온한 공기에 휩싸인 에도 시대 후기. 카리스마 있는 종교가로서의 자질을 남김없이 발휘하며 단숨에 다음 세대를 연 인물이 있습니다. 국학자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입니다.
히라타의 공적은 여럿이지만 특기할 것은, 신도를 업데이트하여 근대로 이어 준 당사자라는 점입니다.
에도 시대의 신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한 가지 사실을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신직에게 ‘당신은 신주(神主)다’라고 인정하는 면허를 발급할 수 있는 가문은 일본에 둘 있었습니다. 요시다가(吉田家)와 시라카와가(白川家)입니다.
요시다가의 신도는 무로마치 시대의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倶, 1435-1511)가 집대성한 유일신도(唯一神道)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도 교토시 사쿄구에는 독특한 존재감을 발하는 요시다산(吉田山)이 자리하고 있고, 요시다 가네토모가 창시한 유일신도의 본궁인 요시다 신사(吉田神社)가 세워져 있습니다.
전국의 신들을 하나의 성역에 모아 모신다는 획기적인, 혹은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시도가 에도 시대 신도 대가문 가운데 하나의 계보를 낳았습니다.
대략 말하면 요시다 신도는 무로마치 시대의 신흥 종교였지만, 에도 막부가 이를 추인합니다.
결정타가 된 것이 1665년에 반포된 「제사 네기 간누시 법도(諸社禰宜神主法度)」입니다.
이로써 요시다가는 조정의 관위를 갖지 않은 전국의 신직에게 신도 재허장(神道裁許状)이라는 면허를 발급하는 이권을 쥐게 됩니다.
당시 신주의 대부분은 요시다가의 면허가 있어야 비로소 신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신을 모실 자격 자체가 하나의 가문에 의해 규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흥 종교로 시작한 요시다가는 이윽고 신도의 절대적 수호자가 되어 이권을 장악하는 중추 역할을 맡았습니다.
한편 시라카와가는 헤이안 시대 제65대 가잔 천황(花山天皇, 재위 984-986)의 후손을 자처하며, 대대로 신기백(神祇伯)이라는 조정의 제사관을 세습하는 가문이었습니다.
백(伯)의 가문이라 하여 하쿠케(伯家)라 불렸고, 하쿠케 신도(伯家神道)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가문은 본래 궁중 제사를 맡는 격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요시다가에 뒤처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시라카와가도 문인을 모으고 독자적으로 면허를 발급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두 면허 발급처가 전국의 신직을 서로 빼앗는 구도가 생겨났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도의 두 대세력의 본거지가 에도가 아니라 둘 다 교토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에도의 ‘신도’란 교의 이전에, 먼저 면허라는 통제의 체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른 형태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신직이 되려면 사실상 도쿄의 고쿠가쿠인 대학(國學院大學)이나 이세의 고가칸 대학(皇學館大學)을 졸업해야 합니다.
이 면허 제도를 통해 신도라는 이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에도 시대의 교토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권은 오래 이어지면 반드시 피폐해지고 문제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실제로 에도 시대 사람들은 구조에 투명성이 없는 신도를 싫어했고, 열려 있는 유교를 적극적으로 배웠습니다.
이렇게 신도는 신뢰를 잃고 안으로 움츠러들어, 이윽고 비밀 교단 같은 수상쩍음을 키우는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편 요시다가도 시라카와가도 새 시대의 재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히라타 아쓰타네였습니다.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던 히라타는 1823년에 시라카와가의 문인이 되었고, 1831년에는 요시다가와도 관계를 맺었습니다. 두 가문의 권위를 이용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운영하는 이부키노야(気吹舎)에 전국의 문인을 모아 사상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 움직임은 단순한 재야 운동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그의 동향을 두려워한 막부는 1841년에 히라타 아쓰타네에게 저술 금지와 에도 퇴거를 명했고, 히라타는 고향 아키타에서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히라타는 무엇을 제기했을까요?
그가 만들어 낸 것은 종래의 면허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우주론이었습니다.
신도를 특정 가문이 지배하는 구조에서 단숨에 우주론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여기에 히라타가 주창한 복고신도(復古神道)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 사상적 원류에는 스승으로 받든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있습니다.
노리나가는 ‘사람은 죽으면 더러운 황천(黃泉)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그 너머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노리나가의 어두운 사생관을 히라타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동란 이전의 18세기를 산 노리나가와 동란기인 에도 시대 후기를 산 히라타 사이의 균열입니다.
그리하여 히라타는 주저 『영능진주(霊能真柱, 다마노미하시라)』(1813년)에서 사후 세계를 대담하게 재구성했습니다. 이것이 복고신도라 불리는 사상적 근거입니다.
그 세계관을 잠시 들여다보겠습니다.
히라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아메노미나카누시(天御中主神)와 조화(造化)의 무스히(産霊神)가 이끄는 생성의 힘으로 관통되어 있고, 사람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오쿠니누시(大国主神)가 주재하는 유명계(幽冥界)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생전의 행실을 심판받고, 그래도 현세를 계속 지켜보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는 단절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본 구조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생사는 불리(不離)‘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노리나가는 생사를 지리(支離)하게 갈라 생각했습니다.
생사를 지리하게 가르는 시각은 불교가 상징적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윤회전생이나 정토 사상 등이 생겨났고, 어떻게든 생사를 통합하거나 체념하는 경지로 향하는 역사와 함께해 왔습니다.
노리나가는 이 경지를 국학이라는 언어로 말했습니다. 거기서 히라타는 노리나가가 말하지 않은 구원을 신화의 언어로 다시 말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복고신도의 골격에는 외래 우주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히라타는 난학자(蘭學者)가 한역한 서양 서적(네덜란드 경유)을 읽었고, 거기서 흡수한 것을 마치 예로부터의 일본의 모습인 양 끼워 넣었기 때문입니다.
복고신도란 잃어버린 순수한 일본을 파낸 발견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롭게 세워진 창조였습니다.
히라타의 비범함은 이 창조를 ‘복고’라는 한마디로 다 말해 낸 카리스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마디가 신도의 본가인 요시다가와 시라카와가의 패권을 무너뜨린 결정적 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라타의 수원(水源)이 정말로 힘을 가진 것은 그의 사후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자 히라타 문하의 국학자들은 새 정부의 제사 행정으로 잇달아 흘러들어, 신기관(神祇官)의 재흥, 신불분리, 대교선포(大敎宣布) 같은 일련의 정책을 사상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이윽고 조슈 계열이 구축한 관료 기구 속에서 밀려나지만, 그 논리만은 국가에 남았습니다.
그 귀결이 요시다가와 시라카와가의 종언입니다.
메이지 신정부는 신직을 국가의 관리 아래 두면서 두 가문이 쥐어 온 면허 권능을 박탈했습니다. 여기서 겉으로는 이권이 해체되지만, 실제로는 메이지 신정부의 관료 기구로 옮겨 놓았을 뿐입니다.
메이지 4년(1871년)에는 세습 신직이 폐지되어 신을 모실 자격을 가문이 발급하던 시대가 끝났고, 신기백이라는 관직도 신기관의 해체와 함께 사라집니다.
두 가문은 훗날 화족(華族)으로 자작에 서임되었지만, 그것은 제사를 총괄하던 가문으로서의 조용한 퇴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요시다 신도는 독자적인 교설째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시대의 전환점에서 두 가문의 힘이 쇠퇴하는 동안, 일본 신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자상전(一子相傳)으로 대대로 비전이었던 두 가문의 오의(奧義)가, 권위의 쇠퇴와 함께 잇달아 밖으로 흘러 나간 일입니다.
이때의 비전 유출은 실은 오늘날 일본 사회의 정신적 골격에까지 흘러들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도 그 보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시작의 땅이 된 요시다산. 지금도 신비로운 신위(神威)가 감도는 이곳에는 미래를 생각하는 씨앗이 묻혀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