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쓰카미 계획 연구소Vol.11

TM MAGAZINE 2026년 7월 7일

가쓰라기 히토코토누시 신사와 가모쓰바 신사|말(言)과 일(事)로 나뉜 두 '고토'의 신

'고토'는 '言'이자 '事'라는 감성은 말(言)의 히토코토누시노카미, 일(事)의 고토시로누시노카미를 신화에서 낳았다. 가쓰라기산 기슭에는 가쓰라기 히토코토누시 신사가, 그 기슭의 평야부에는 가모쓰바 신사가 있다. 두 '고토'의 신들이 이웃해 있는 모습에 고대 일본인의 감성이 드러난다.

712년에 성립한 『고사기(古事記)』와 720년에 성립한 『일본서기(日本書紀)』.
둘 다 8세기 전반에 성립한 현존 일본 최고(最古)의 책이지만, 지금은 거의 읽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들이 성립한 지 천 년도 더 되었지만, 사실 널리 읽히는 기층이 구축된 것은 그리 먼 옛날이 아닙니다.
돌이켜 보면 에도 시대,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들여 『고사기』를 독해하여 1798년에 『고사기전(古事記傳)』을 탈고했습니다. 사후인 1822년경부터 전 44권이 출판되었을 때 비로소 『고사기』가 널리 읽히는 토대가 구축되었습니다.

『고사기전』이 등장하기 전의 천 년은 어느 쪽이냐 하면 『일본서기』의 독무대였고, 『고사기』는 거의 이름이 거론되는 일조차 없는, 지식인들의 우선순위가 낮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천 년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에 『고사기』의 흥미로움이 숨어 있습니다.

노리나가의 『고사기전』은 『고사기』가 『일본서기』 이상으로 중시되는 구조적 전환점의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이후 후계자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가 스승의 『고사기전』을 영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종교 운동과 접속하는 문을 열자, 에도 시대 후기의 불안정한 시세가 겹치면서 『고사기』를 기층에 둔 종교 운동이 각지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훗날 신종교로 자리매김하지만, 모체가 된 곳은 대체로 에도, 오사카, 교토 등에서 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1814년에 오카야마의 구로즈미교(黒住教), 1859년에 같은 오카야마의 곤코교(金光教), 1838년에 나라의 덴리교(天理教)의 원류가 탄생했고, 그 밖에도 수많은 신종교가 서일본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집대성으로서 교토부 아야베에서 오모토교(大本教)가 탄생하여 신종교는 하나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신들림이나 영적인 초능력자를 개조(開祖)로 두고 있었지만, 공통된 정신적 기반은 히라타 아쓰타네를 거친 『고사기』였습니다.
왜 『고사기』에는 영적인 능력을 열어 주는 힘이 숨어 있는가?
이 수수께끼를 언어화하기 위해 히라타 아쓰타네의 제자들이 선전한 것이 ‘고토다마(言霊)‘였습니다.

고토다마는 지금도 일부 사람들에게 정신적 기반으로 남아 있지만, 감성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흔적을 전하는 『만요슈(萬葉集)』를 제외하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습니다.
다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가쓰라기산(葛城山) 기슭의 ‘히토코토누시(一言主神)‘가 신으로 나타나 있고, 이 신이 고토다마의 시조신이라는 믿음이 지금도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원래 문자 문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일본의 선인들은 소리, 아니 진동을 통해 세계를 서로 전달했기에, 소리 자체에 신이 반영된다는 사상이 공유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문자를 사용하는 일은 소리라는 붙잡을 수 없는 광대무변한 세계의 신을 규제하는 행위였고, 나쁜 일로 꺼려 온 역사가 있었습니다.

『만요슈』에는 야마노우에노 오쿠라(山上憶良)의 “고토다마의 복을 내리는 나라라고 이야기로 전하고 말로 이어 왔노라”,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의 “시키시마의 일본 나라는 고토다마가 돕는 나라이니 부디 무탈하기를”, “고토다마의 여든 갈래 네거리에서 저녁 점을 묻노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의 노래는 훗날 고토다마 신앙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토’라는 울림 속에 다원적 세계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토’는 ‘말(言)‘이자 ‘일(事)‘이라는 감성이, 말의 히토코토누시, 일의 고토시로누시(事代主神)를 신화 속에서 낳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신의 거점이 이웃해 있다는 점입니다.

마침 오사카와 나라의 현 경계에 솟은 산맥 속에서 가쓰라기산 기슭에 세워져 있는 것이 가쓰라기 히토코토누시 신사(葛城一言主神社)인데, 그 기슭의 평야부에는 가모쓰바 신사(鴨都波神社)가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의 구분으로는 두 신사 모두 나라현 고세시이지만, 예부터 이 지역 일대는 같은 세력권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히토코토누시는 가쓰라기 히토코토누시 신사에, 가모쓰바 신사에는 고토시로누시가 모셔져 있습니다. 두 ‘고토’의 신이 이웃하여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에야말로 고대 일본인이 붙잡고 있던 감성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토’ 신앙을 주재한 것은 누구였을까요? 그 정체로서 지금도 전해지는 것이 수수께끼에 싸인 가쓰라기씨(葛城氏)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쓰라기씨는 닌토쿠 천황(仁德天皇)과 가까운 왕통에 관계된다고 하는데, 요컨대 대왕 닌토쿠 천황을 옹립한 주요 집단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고대 씨족으로서 5세기대에는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고대 야마토에 군림했지만, 일찌감치 6세기 전반에는 몰락했고 그 뒤의 상세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지역 일대에서는 가쓰라기씨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고분 시대의 유적이 다수 발견되었고,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훌륭한 하니와(埴輪)의 조형 기술입니다.

이 지역이 까다로운 것은 씨족의 교체가 현저히 진행된 영향으로 다층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전형적인 예가 두 ‘고토’를 모시는 신사 이름의 첫머리에 ‘가쓰라기’와 ‘가모(鴨)‘가 나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 이 지역의 가쓰라기씨가 몰락한 전후, 나아가 후대에 걸쳐 새로운 가모씨(賀茂氏, 加茂氏·鴨氏)가 덮어씌워진 흔적을 전하며, 도래계 신흥 씨족인 가모씨가 가쓰라기계의 유산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훗날 헤이안쿄 천도 시대에 접어들자, 도읍의 귀족과 황족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가모씨는 지금의 시모가모 신사(下鴨神社) 근처를 거점으로 암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흥 도래 세력이었습니다.

지금도 가쓰라기산 기슭에 남아 있는 다층의 흔적.
그것을 전하는 것이 두 ‘고토’로 나뉜 신들입니다.

사상가 미쓰이 다카히로의 주간 에세이 Project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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