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EMA 2400Vol.18

TM MAGAZINE 2026년 8월 25일

독립 프로덕션의 싸움은 만들 자유가 아니라 상영될 자유를 둘러싼 것이었다

1950년 적색 사냥으로 촬영소에서 쫓겨난 영화인들은 신성영화사를 설립했고, 쇼치쿠를 퇴사한 신도 가네토와 요시무라 고자부로는 근대영화협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전국의 영화관은 대형사의 계열에 편입되어 있었다. 만들 자유가 아니라 상영될 자유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지난주에는 패전 직후 도호(東宝)가 전후 최대의 노동 쟁의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왜 영화계의 노동 쟁의에 미군까지 출동해야 했을까요?

그 이유가 ‘적색 사냥(레드 퍼지)‘입니다. 우선 냉전이 격화되면서 점령군 GHQ는 일본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합니다. 여기서 점령군이 일본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목표에서 국내 공산주의 세력의 억제로 방향을 틀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전후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은 역사적으로 붉은 사람이 많았던 곳이 영화계였습니다. 그래서 점령군의 지령을 받은 일본 정부·재계·우익이 결탁하여 일본 공산당원과 동조자(심퍼)를 탄압했고, 대규모 공직 추방·해고 탄압 사건이 잇달아 일어납니다. 이 와중에 일본 영화계에서도 공산당원과 그 주변의 영화인이 잇달아 추방되었습니다. 야마모토 사쓰오(山本薩夫), 이마이 다다시(今井正), 가메이 후미오(亀井文夫), 이토 다케로(伊藤武郎) 같은 급진적인 영화인들이 촬영소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의 활력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촬영소에서 쫓겨난 그들이 같은 해에 설립한 것이 신세이 영화사(新星映畫社)였습니다. 이 자금의 출처는 실은 도호였습니다. 쟁의 해결금으로 도호에서 지급된 1,500만 엔을 밑천 삼아 반항 정신이 풍부한 영화인들이 일어선 것입니다.

게다가 그 밑천으로 야마모토 사쓰오가 찍은 『폭력의 거리』(1950년)는 놀랍게도 제작비를 웃도는 흥행 성적을 올렸습니다. 공산당원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총동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마이 다다시의 『그래도 살아간다』(1951년), 야마모토 사쓰오의 『진공지대』(1952년) 등 뼈대 굵은 사회파 작품이 대형 영화사의 바깥에서 잇달아 나왔습니다.

한편 같은 무렵, 전혀 다른 경위로 바깥에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각본가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훗날 감독)와 감독 요시무라 고자부로(吉村公三郎)는 쇼치쿠(松竹)에서 명콤비로 알려져 있었지만, 1949년에 만든 세 편이 흥행에서 실패하자 쇼치쿠는 다음 작품의 제작을 거부했고, 나아가 회사로부터 콤비 해체까지 강요받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1950년 3월 쇼치쿠를 퇴사하여, 프로듀서 이토야 도시오(絲屋寿雄), 배우 도노야마 다이지(殿山泰司) 등과 긴다이 영화협회(近代映畫協會)를 결성합니다.

이쪽은 사상도 탄압도 아니라 기획이 통과되지 않아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주 제작 정신이야말로 당시 영화인들을 떠받친 진짜 힘입니다. 이렇게 신도는 『원폭의 아이』(1952년)를 발표했습니다. 다이에이(大映)가 기획에 난색을 보여 자주 제작이 되었고, 호쿠세이(北星)의 배급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주연 오토와 노부코(乙羽信子)는 이 영화를 위해 다이에이를 퇴사했습니다.

말하자면 점령군 쪽 사정에 따른 적색 사냥과, 제재에 움츠러든 회사 쪽 사정이 얽히면서, 여기서 반골 정신을 지닌 영화인들이 잇달아 독립의 활로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전반 일본 영화에 ‘독립 프로’라는 말이 자리 잡은 것은 단순한 조류가 아니라 그야말로 시대의 상징이었습니다.

다만 독립 프로라는 말 자체는 전쟁 전부터 있었습니다. 일본 영화의 뼈대를 이룬 마키노 쇼조(牧野省三)의 마키노 프로, 천황이라 불린 대스타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郎)와 가타오카 지에조(片岡千恵蔵)의 독립 프로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발성 영화(토키)의 도래로 설비 투자가 불어나 대기업에 흡수되어 갔습니다.

전후의 그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여기서 ‘독립’이란 대기업으로부터의 독립을 가리키며, 정치적 압력과 점령에 대해 ‘NO’를 들이대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창조였습니다. 본래의 창조란 지금처럼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이었고, 거기서 귀환한 자만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혹한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도 불과 몇 년 만에 퇴조해 갑니다. 이유는 사상도 재능도 아닙니다. 지난주에 전한 대로, 대형 영화사가 극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상영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 시대에 독립 프로라도 만드는 일은 어떻게든 할 수 있었습니다. 모금을 받고, 배우가 무보수로 출연하고, 장비를 긁어모으면 됩니다. 하지만 완성된 필름을 어디서 관객에게 보여 줄 것인가. 실은 이것이 제작사에서 가장 큰 장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전국의 영화관은 계열에 편입되어 있었고, 프로그램은 자사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독립 프로의 작품을 일주일씩이나 걸어 주는 극장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조합이나 영화 서클의 자주 상영에 의지했습니다. 공민관에서, 공장 식당에서, 학교 강당에서 상영합니다. 그것은 뜻이 높은 운동이었지만 흥행이 아니었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특히 회수할 가망이 서지 않는 이상 다음 한 편을 짤 수 없습니다. 게다가 흥행은 1950년대 무렵부터 점령군의 뜻을 받은 우익(고다마 요시오, 児玉誉士夫)에게 동원된 전국의 야쿠자 조직이 관여하게 되었기에, 공산주의 계통 영화가 상영될 가능성은 극한까지 사라져 갔습니다.

그 필두로 대두한 것이 3대 다오카(田岡) 조장이 이끄는 야마구치구미(山口組)였습니다.

1954년 무렵부터 대형 영화사가 양산 체제를 완성하자 독립 프로 운동은 조용히 사그라들었고, 격심한 사회적 탄압을 입은 영향도 있어 많은 감독이 대형 영화사의 일로 돌아갔습니다. 긴다이 영화협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신도 가네토가 대형 영화사용 각본을 대량으로 쓰고 그 벌이로 자신들의 영화를 계속 찍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일본 영화사의 밑바닥을 흐르는 물음이 하나로 좁혀지는 듯합니다.

만들 자유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영될 자유를 둘러싼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이 훗날에도 깊은 곳에서 이어집니다.

제작과 배급과 흥행이 한 줄로 독점되어 있는 한, 그 줄 바깥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만들어도 관객에게 닿지 않습니다. 독립 프로가 처음 부딪힌 것은 이 거대한 벽이었고, 그리고 이 벽은 60년대에도 70년대에도 모습을 바꾸어 계속 서 있습니다.

지금처럼 유튜브나 아마존 프라임으로 자작 영화를 공개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 한복판에서 선인들이 상영될 자유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움을 계속했기에 영화는 진심이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독립 프로가 보통이 되고 영화 상영의 자유가 실현되면 영화는 매력을 잃습니다. 이 구조적 모순은 지금처럼 배포의 자유 비슷한 것에 잠겨 있는 현대인을 보면 자명해 보입니다.

여기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이전에 전한 ATG입니다. 왜 ATG는 ‘한 달간 반드시 상영한다’는 조항을 굳이 제3조에 썼을까요? 그 한 줄의 의미를 여기서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회에는 이 벽에 대해 60년대의 만드는 이들이 어떻게 도전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적색 사냥을 넘어 본격적인 투쟁의 계절에 들어선 와중에, 독립 프로는 다음 차원으로 승화되어 갔습니다.

사상가 미쓰이 다카히로의 주간 에세이 Project 2049

영어로, 매주 금요일 오후 5시(일본 시간). 좋아요도 댓글도 순위도 없습니다. 에세이와 당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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