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 MAGAZINE 2026년 9월 1일
와카마쓰 고지의 핑크 영화와 붉은 버스 상영대|상영될 자유를 얻는 세 가지 해법
1960년 쇼치쿠는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 상영을 무단으로 중단했다. 상영될 자유를 구한 이들의 해법은 셋이다. 와카마쓰 고지처럼 다른 망에 올라탄다. 오가와 프로의 자주 상영이나 붉은 버스 상영대처럼 스스로 망을 만든다. 그리고 망을 가진 어른과 손을 잡는다.
지난 회에 독립 프로덕션이 부딪힌 벽은 ‘만들 자유’가 아니라 ‘상영될 자유’였다고 썼습니다. 오늘날에는 온갖 최첨단 기술 등을 구사하면 누구나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유튜브, 아마존 프라임, 비메오, 틱톡을 비롯한 많은 플랫폼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것은 인류사상 처음의 민주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정말 중요한 것이 떠올라 있다는 점을 많은 분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할 상대입니다.
크리에이터든 무엇이든 모든 만드는 이는 본래 ‘전할 상대’를 헤아리며,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제작하고 제기해 왔습니다. 이것은 ‘만들기/전하기’가 순환하지 않던 시대에 진지하게 고민된 문제였지만, 오늘날처럼 누구나, 언제든, 간단히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만드는 이에게서 ‘전할 상대’의 얼굴이 사라지고, 어느새 불특정 다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대로 추상화되었습니다.
서비스 구조이긴 하지만, 20세기 후반의 일본처럼 일억 총중류라고 불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절충 체제에서는 이 방식이 효율적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른바 성공 모델로서 계속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먼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성공 모델이 확립되기 전야의 움직임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60년대 영화계의 만드는 이들은 이 벽에 어떻게 도전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싸우는 방식을 근본부터 바꿨습니다. 단순히 ‘만드는 회사’를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상영하는 데까지 스스로 떠안는 집단으로 변모해 간 것입니다. 여기에 독립 프로덕션의 진짜 재미가 있습니다.
그 상징이 1960년 10월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쇼치쿠(松竹)의 젊은 감독 오시마 나기사(大島渚)가 안보 투쟁을 정면으로 그린 『일본의 밤과 안개』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개봉 나흘째인 10월 12일,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연설 중에 찔려 숨진 사건이 일어났고, 쇼치쿠는 이 정치적인 작품에 대한 반응을 두려워해 오시마에게 알리지 않고 상영을 중단해 버렸습니다.
작품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제작자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회사 윗선이 제멋대로 상영을 멈춘 것입니다. 애초에 오시마는 교토 대학 시절 교토부 학생자치회 연합 위원장을 맡는 등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투쟁 운동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총괄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소속 회사가 무단으로 상영을 멈춘 데 대해 오시마는 맹렬히 항의했습니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기에 스스로 위약금까지 내고, 이듬해인 1961년 쇼치쿠를 퇴사합니다. 이것이 1960년대 영화사의 막을 연 일입니다. 그리고 아내이자 배우인 고야마 아키코(小山明子), 각본가 다무라 쓰토무(田村孟)와 이시도 도시로(石堂淑朗), 배우 고마쓰 호세이(小松方正)와 도우라 롯코(戸浦六宏), 이렇게 오시마를 포함한 여섯 명이 ‘창조사(創造社)‘를 설립했습니다.
그가 회사를 나온 이유는 찍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찍은 것을 관객에게 보여 주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까지 살펴본 50년대의 독립 프로덕션은 적색 사냥(레드 퍼지)으로 촬영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대는 결이 다릅니다. 상영이라는 한 점에서 회사와 결별한 사람이 스스로 전부 하기로 정한 운동의 연장선입니다.
이 움직임에 이어, 쇼치쿠 누벨바그라 불린 같은 세대가 잇따라 회사 밖으로 나옵니다. 요시다 요시시게(吉田喜重)는 현대영화사를,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는 효현사(表現社)를 설립했습니다. 닛카쓰(日活)에서 기획이 통과되지 않게 된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도 집을 담보로 잡혀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립니다. 그들이 이윽고 ATG와 합류해 가는 흐름은 대기업에 대한 이반이라는 형태로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가장 선명하게 시대를 상징한 한 남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와카마쓰 고지(若松孝二)입니다.
그는 텔레비전 조감독 시절 각본 개변에 화가 나 프로듀서를 때리고 그 자리에서 해고된 인물입니다. 업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끝에 갈 곳을 잃은 그가 흘러든 곳이 핑크 영화(포르노 영화의 전신)였습니다. 와카마쓰는 1963년 『달콤한 덫(甘い罠)』으로 데뷔했습니다. 직접 제작비 150만 엔을 들여 찍은 이 작품이 이례적인 관객 동원을 보이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1965년 와카마쓰 프로덕션을 설립합니다. 그 첫 작품 『벽 속의 비사(壁の中の秘事)』가, 일본영화제작자연맹이 추천한 다이에이(大映) 작품을 제치고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정식 상영작으로 선정되었을 때 업계에 큰 충격이 일었습니다.
영화계의 주장은, 핑크 영화가 나라를 대표해 국제영화제에 나가다니 무슨 일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일본 영화’로 홍보하고 싶은 일본적인 주제를 제쳐 두고 이런 모욕적인 영화가 국제영화제에 나가 버리면 일본의 이미지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외무성까지 반대 성명을 내는 사태가 되었고, 도호(東宝)의 전무는 와카마쓰가 베를린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자유지만 일본국이 망신을 당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으며, 평론가에게서는 구제할 길 없는 삼류 이하라는 욕설까지 튀어나왔습니다. 이듬해인 1966년 영련(映連)은 이 출품에 대한 항의로 베를린 영화제 자체를 보이콧했습니다. 훗날 ‘국치 영화’ 사건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이 소동의 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독립 프로덕션의 가장 큰 장벽은 상영할 장소였습니다. 전국에 영화관은 무수히 많은데도 전부가 대형 6개 사의 계열에 편입되어 있었고, 프로그램은 자사 작품으로 채워져 있어서 외부 제작자가 만든 영화를 상영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대형사의 망 바깥에서 시대의 요구로 또 하나의 흥행망이 착실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인 영화관이었습니다. 핑크 영화는 자존심 강한 대형사가 다루지 않는 장르이고,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장르였습니다. 하지만 수요는 매우 높았습니다. 그렇기에 독자적인 제작사와 독자적인 극장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들면 반드시 걸리는 곳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관객은 딱히 내용을 따져 보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와카마쓰는 이 구조를 이용했습니다. 어쨌든 규정된 정사 장면만 넣어 두면 나머지는 무엇을 찍어도 좋았습니다. 창조력이 넘치는 와카마쓰에게 이 자유는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최상의 실험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핑크 영화에서 와카마쓰가 구축하기 시작한 자유가 하나의 중요한 움직임과 결합합니다. 그 자신이 야마토야 아쓰시(大和屋竺), 아다치 마사오(足立正生), 오키시마 이사오(沖島勲) 같은 과격한 재능을 잇따라 등용해, 아파트 단지의 폐쇄감, 좌익 정당의 퇴폐, 원폭증, 국가와 폭력이라는 주제를 핑크 영화의 틀 안에 쏟아 넣었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은 일반적으로 정사(正史)에서는 금기이지만 획기적입니다. 그들은 검열을 돌파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검열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을 흥행망째 장악한 것입니다.
특히 제가 무척 좋아하는 아다치 마사오는 1971년 와카마쓰 고지와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PFLP 게릴라 부대와 공투했고, 1974년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의 일본 적군에 합류했습니다. 국제 수배를 받고 1997년 레바논에서 체포되어 루미에 교도소에서 3년을 복역한 뒤, 2000년 3월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이스라엘주의에 의한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서는 최초의 운동의 모체 한복판에서, 아다치는 시게노부 등과 함께 살았던 것입니다.
강제 송환 이후에도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 가고 있으며, 2022년에는 『REVOLUTION+1』을 발표했습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격 사건의 실행범을 소재로 한 픽션으로, 국장(國葬) 반대를 내건 영화입니다. 활동가 아다치답게 긴급 상영이 이루어진 것은 아베 신조의 국장 전날과 당일인 9월 26~27일. 이것이 진짜 크리에이터라고,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편 전혀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록 영화를 만드는 이들입니다.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는 이와나미 영화 제작소와의 계약을 해소하고 1966년 『청년의 바다(青年の海)』를 자주 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67년 오가와 프로덕션을 설립해 『압살의 숲(圧殺の森)』으로 다카사키 경제대학의 학원 투쟁을, 『현인 보고서(現認報告書)』로 하네다 투쟁을 찍습니다. 그리고 1968년부터는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들 속에 들어가 살며 산리즈카 시리즈를 일곱 작품에 걸쳐 계속 찍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반체제로 간주되는 이상 당연히 어느 영화관에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영회 자체를 조직한 것입니다. 전국에 자주 상영 모임이 만들어지고, 지지자들이 필름을 짊어지고 공민관이나 대학 교실을 돌았습니다. 지금도 자주 상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원류는 여기에 있고,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오늘날의 자주 상영에서 이 움직임 이후 이렇다 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난 회에 50년대의 자주 상영을 ‘뜻은 높지만 흥행은 아니다’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60년대는 규모가 다릅니다. 산리즈카 투쟁이 전국적인 운동이 된 것은 오가와 프로 작품의 자주 상영이 각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당시 반대 동맹 관계자 본인이 증언했을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사진가 기타이 가즈오(北井一夫)도 들어가 있었으며, 이른바 장비의 민주화가 이런 사람들의 등장을 뒷받침했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가 운동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상영이라는 행위가 운동 그 자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흐름의 정점이 1971년에 나타납니다.
와카마쓰 고지와 아다치 마사오는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고 돌아오는 길에, 놀랍게도 그대로 팔레스타인으로 직행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아랍 게릴라의 일상을 찍어 『적군-PFLP·세계전쟁선언』을 완성합니다. 이 영화는 전선 한복판을 도려낸 영화이며, 어째서 지금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지 저는 이상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귀국 후 버스를 한 대 샀습니다. 새빨갛게 칠한 버스에 영사기와 필름을 싣고 ‘붉은 버스 상영대’라 이름 붙여 신주쿠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았습니다. 상영될 곳이 없다면 상영하는 곳을 달리게 하면 됩니다.
이것은 50년대 이래 20년 동안 독립 프로덕션이 줄곧 안고 있던 물음에 대한, 이보다 더할 수 없이 물리적인 답이었습니다. 더 이상 영화관이라는 건물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필름과 영사기와 모이는 사람만 있으면 그곳이 극장이 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장 첨예했고 선두에 서 있었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기까지 오고서야 마침내 전체가 보입니다. 상영될 자유를 구한 사람들이 다다른 해법은 결국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다른 망에 올라타는 것. 와카마쓰가 핑크 영화의 극장망을 이용한 방식입니다. 둘째는 스스로 망을 만드는 것. 오가와 프로의 자주 상영과 붉은 버스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셋째가 망을 가진 어른과 손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전에 말씀드린 ATG입니다.
돈은 절반이면 된다, 참견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1개월은 반드시 건다. 그 제3조는 왜 제3조로 쓰여야 했을까요? 여기까지 20년을 지켜본 독자께는 이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절은 끝납니다. 결정적 순간은 1972년 연합적군이 내부에서 무너진 사건입니다. 이로써 관객이 사라져 갔고, 1974년 영화 산업 쇠퇴를 배경으로 대형사는 마침내 제작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으며, 닛카쓰는 로망 포르노에, 도에이(東映)는 실록 노선에서 활로를 찾았습니다. 독립 프로덕션이라는 말 자체가 어느새 특별한 울림을 잃어 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80년대 이후 영화는 기본적으로 제작위원회와 독립 프로덕션이 만드는 것이 됩니다. 촬영소에 감독이 사원으로 소속되어, 10년을 근무하고 나서야 첫 작품을 찍게 해 주는 그런 구조는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형사가 쥐고 있던 수직의 한 줄기 선은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독립 프로덕션은 진 것이 아니라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누구나 찍을 수 있고 누구나 공개할 수 있는 시대에 있습니다. 카메라는 손안에 있고 배포 창구는 무수히 많습니다. 20년에 걸쳐 선인들이 구한 ‘상영될 자유’는 원리적으로는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다만 실현해 보고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과 거의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대에 상영을 일주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목숨을 건 것은, 그 일주일 동안 반드시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벽이 있었기에 돌파할 의미가 있었습니다. 벽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돌파해야 할 것을 잃고, 대신 무관심이라는 더 두꺼운 벽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시의 제작자와 관객은 서로 갈라져(支離) 있지 않았고, 하나의 무언가에 감싸인 불리(不離)의 경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흥행이 성립했던 것인데, 지금처럼 사람들이 공통의 무언가를 갖지 못한 시대에는 애초에 제작/관객이 갈라져 있어 결코 맺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2010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크게 직면할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이야기와 종교로의 회귀가 외쳐지는 것은 이 공동의 감성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분리(支離)와 고립은 가차 없이 가속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대형사의 구조에서 독립 프로덕션의 흥망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지키려 한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찍은 것이 모르는 누군가의 눈앞에 일정한 시간 동안 확실히 놓이는 것. 지키려 한 것은 오직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