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 MAGAZINE 2026년 10월 6일
AI는 좌뇌적 세계의 종착점|우뇌적 세계를 끝까지 파고들어 탈플랫폼으로 나아가라
AI는 근대 서양 논리의 종착점에 있으며, 좌뇌적 특징이라는 근대 구조를 그대로 전부 대체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우뇌적 세계의 요소를 끝까지 파고들면 된다. 발품을 팔아 1차 정보를 얻고, 느낀 것을 언어화하여, 기존 플랫폼이 아니라 직접 만든 자신의 세계에 둔다.
날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AI’라는 말. 이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AI 시대라 불리는 가운데서 정말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범람하는 AI 정보의 대부분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안을 부추기는 발언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인간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기준점이 되는 것이 사물을 이원론으로 사고하는 서양의 논리입니다. 애초에 AI는 근대 서양 논리의 종착점에 놓여 있으므로, 정말로 살아남고 싶다면 근대의 구조적 결함을 찌르면 됩니다.
최근 이 경향을 노골적으로 보여 준다고 느낀 것이 영국의 정신과 의사 이언 맥길크리스트가 제창한 ‘좌우 반구 가설’입니다. 이 가설은 1970~80년대에 퍼져 지금도 뿌리 깊은 영향력을 지닌 ‘좌뇌=논리·언어, 우뇌=직관·예술’이라는 속설적인 기능 분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좌뇌와 우뇌의 영역을 다시금 이원론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논리를 자신의 신경과학, 철학, 문예 비평과 결합하여 AI 시대의 인간을 논합니다.
주저 『The Master and His Emissary(주인과 사절)』와 『The Matter with Things』의 핵심은 ‘무엇을 하는가(What)‘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에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는가(How)‘라는 근본적인 양식의 차이로 이야기되며, 모든 고등 동물은 살아남기 위해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주의를 동시에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좌반구는 ‘좁고 날카롭게 대상을 고립시키는 주의’를 맡고, 우반구는 ‘넓고 열려 있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포괄적인 주의’를 맡는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눈앞의 모이를 쪼고, 먹잇감을 붙잡고, 도구를 쥐기 위한 주의이자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 내 정지시키고 조작·이용할 수 있는 ‘부품’으로 움켜쥐는 힘으로 곧장 이어지고, 후자는 등 뒤로 포식자가 다가오지 않는지, 주위의 무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아채는 주의이자 언제나 맥락 전체를 둘러보며 예기치 못한 새로운 것, 계속 변해 가는 전체성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곧장 이어진다고 제시됩니다.
맥길크리스트는 이 이중의 주의 구조가 인간의 인식론과 존재론의 토대를 이룬다고 논하며, 좌반구를 ‘사절’, 우반구를 ‘주인’으로 이원화했습니다. 더없이 근대 서양적인 발상입니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 자신이 ‘AI’가 좌반구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풀어 말하면, 좌뇌적 특징은 분석, 요소로의 분해, 명문화·규칙화, 유용성이고, 우뇌적 특징은 전체성, 암묵지, 은유, 신화, 신체성, 타자와의 관계성입니다.
요컨대 좌뇌적 특징이라는 근대의 구조를 AI가 그대로 통째로 대체했을 뿐인 이야기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AI가 인류를 멸망시킨다며 소란을 떠는 근원은 ‘끝나지 않는 근대’라는 시스템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 근대 서양이 이야기해 온 ‘인간’이라는 것이 실은 대체 가능한 자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AI의 부상으로 분명해진 것입니다. 제 시각으로는 이것이 ‘서양의 자살’입니다.
물론 그의 논리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지만, 착상으로서는 충분합니다. 좌뇌적 세계의 궁극적인 구현이 AI라면, 그 세계는 차라리 AI에 맡겨 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발상에는 근대 서양, 그리고 근대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모든 존재(분리를 전제로 하는 사고)가 이르지 못합니다. 이유는 근대 이후의 서양이 바로 이 영역에 지성을 두고 그 힘의 대부분을 쏟아 왔기에, 그것을 내려놓겠다는 결단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는 방식을 바꾸면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
‘AI에 미래가 있다’는 말을 이 맥락에 놓고 다시 읽으면, 그것은 좌뇌적 세계가 점차 AI로 일원화되어 가는 미래를 암시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좌뇌적 세계가 경시하고 잘라 내 온 우뇌적 세계의 여러 요소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가치가 치솟습니다. 이 생각은 극히 단순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AI가 미래를 향해 가속한다면, 동시에 우뇌적 세계의 여러 요소를 지닌 인간도 미래를 향해 가속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불리(不離)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우뇌적 세계의 요소를 끝까지 파고들면 됩니다. 물론 일본인이 그들의 이원론을 끌고 갈 이유는 없으므로 이것들을 분리하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때 최근 제가 힘써 온 탈플랫폼이라는 선택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우선 세상에는 SNS를 끊고 싶은데 끊지 못하는 사람이 대량으로 있습니다. 그들은 좌뇌적 세계를 구현한 AI의 가속으로, SNS 세계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보 범람의 물결을 늘 뒤집어쓰며 늪에 빠지듯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삶기는 개구리처럼 서서히 일어나기에, 어느새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가까운 미래는 확정되어 있고,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꼼짝 못 하게 되기 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탈플랫폼을 끝내 두는 것입니다. 이미 꼼짝 못 하게 된 사람이 다수인 지금, 일일이 다른 사람과 의논하다가는 휘말릴 위험이 더 큽니다. 서로 발목을 잡는 것은 끝나 가는 존재의 상투적인 수단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것을 실현하면 99%처럼 늪에 발이 빠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빠져나오고 싶지만 빠져나오지 못해 끙끙대는 결단력 없는 사람들의 눈에 하나의 모델로 쉽게 띄게 됩니다.
물론 단지 탈플랫폼을 하는 것만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인가’를 오랜 세월 묻고 고뇌한 준비 위에 얹히는 것이고, 아무 준비 없이 해 봤자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비관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탈플랫폼을 이루는 사람이 하는 일은 실은 극히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AI 시대의 개인으로서 조용히 부상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반드시 보입니다. 그것을 따라 하는 데서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은 좌뇌적 세계를 AI에 80% 이상 대체시키면서, 스스로는 우뇌적 세계의 요소를 철저히 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맥길크리스트를 거꾸로 이용하는 것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는 ‘AI에게는 몸이 없고, 감정이 없고, 영혼이 없고, 죽음의 자각(유한성)이 없기’ 때문에 본질적인 맥락이나 현실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을 인간은 철저히 하면 됩니다. 거기에 떠오르는 21세기의 키워드야말로 철학과 종교입니다. 몸이 있고, 감정이 있고, 영혼이 있고, 죽음의 자각이 있는 인간이기에, AI가 가속하면 할수록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자신이 우뇌적 특징은 전체성, 암묵지, 은유, 신화, 신체성, 타자와의 관계성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인간은 각자의 타고난 몫 안에서 그것에 힘쓰면 됩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발품을 팔아 1차 정보를 얻고, 스스로 사진·영상을 찍어 느낀 것을 언어로 옮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존 플랫폼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자기 세계에 둡니다. 할 일은 이것을 돌리는 것뿐입니다. 가능하다면 여러 언어로.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대는 ‘누구나 크리에이터’라 불리던 SNS 시대를 끝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누구나 개인 연구자’로서 몰두할 수 있는 주제를 갖고 오로지 탐구를 이어 가는 것. 그 성과를 플랫폼 바깥에서 발신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즉, 같은 일을 해도 미래는 달라집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기존 플랫폼이나 SNS에 발신을 계속 의존하는 사람은 도태되고, 스스로 만든 자리에 둘 수 있는 사람이 부상합니다.
옛 전국시대, 혼돈의 세상에서 괭이를 버리고 칼을 쥐고 일국일성(一國一城)의 주인을 꿈꾸며 마을을 뛰쳐나온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다수 부상했습니다. 그 끝에 일어난 천하를 가를 싸움. 지금 우리는 한꺼번에 글로벌 무대로 부상할 수 있는 무기를 한 사람 한 사람이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극히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묻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 무기를 단순한 조사나 상담에 쓸 것인가, 아니면 진지하게 시대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쓸 것인가. 수십억 명이 같은 무기를 쓰며 일국일성의 주인을 목표로 일제히 부상하는 난세. 천하를 가를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