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 MAGAZINE 2026년 6월 30일
관광의 어원은 『역경』의 관괘(觀卦)|본뜻은 나라의 덕이 내는 빛을 보는 정치적 관찰
'관광'의 어원은 『역경』 관괘의 '나라의 빛을 보니, 왕에게 손님 되기에 이롭다'이다. 빛이란 경치나 명소가 아니라 한 나라의 '덕'이 내는 광채를 가리킨다. 관광은 한가로운 유람도 자아 찾기의 자리도 아니고, 지극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관찰이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관광(觀光)’. 손때가 묻은 이 말에는 잊힌 무거운 출신이 있습니다.
어원은 동양 최고(最古)의 고전 『역경(易經)』 64괘 가운데 제20괘인 풍지관(風地觀), 곧 관괘(觀卦)에 있습니다. 『역경』은 유교의 근본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로, 유학자에게 필독서로서 천 년 넘게 읽혀 왔습니다.
지금은 잊혔지만, 일본도 전국 시대를 이겨 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 막부를 열면서 유교를 새 시대의 체제 철학으로 받아들인 영향으로, 대유교 시대라 부를 만한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그 영향은 전쟁 전까지 이어졌고, 전후에 점령군이 유교의 가르침을 금지하면서 잃어버린 시대를 맞게 됩니다.
그 『역경』 안에 적혀 있는 것이 ‘觀國之光, 利用賓于王’입니다.
훈독으로 풀면 ‘나라의 빛을 보니, 왕의 손님이 되기에 이롭다’가 됩니다.
‘관광’이라는 말은 이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지만, 말 자체가 오늘날의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메이지 이후입니다. 영어 tourism이나 sightseeing의 번역어로 이 오래된 말이 채택된 배경이 있습니다.
그 순간 『역경』 이래 관광이 지녔던 본래의 뜻은 형해화되어 서구 자본주의적 소비의 맥락으로 기울고 말았다고 생각하면, 그 말로가 160년이 지난 지금 세계 각국의 오버투어리즘으로 드러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다시 말해 말의 관점에서 보면, 영어의 tourism에는 오늘날의 대소비적 관광 시대를 억누를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의 귀결이 지금의 시대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부터 제 자신이 관광업에 관여하게 되면서 맞닥뜨린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지금 관광업에 관여하는 지자체, 상장 기업, 관료 기구와 여러 단체, 그리고 땅의 실권자까지 포함해서, 본래의 관광을 아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서구적 소비라는 맥락의 연장선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관광이라는 말만 범람하지만, 거기에 실체는 없습니다.
일찍이 일본에서 ‘말 그 자체가 신이다’라는 언령(言霊, 고토다마) 신앙이 일어났듯이, 우리 일본인에게 말의 형해화나 어긋남은 곧바로 현실 세계에 반영됩니다. 사업자로서 관광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말의 본뜻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현대인에게 언제나 사각지대여서, 큰 규모로 실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작은 규모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함께, 분산적으로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버투어리즘에 시달리는 곳도, 반대로 관광객 유치에 고민하는 지역도, 하나같이 낡고 잘못된 구조 위에 선 채 모든 것이 소비되어 사라지기를 스스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늑대에게 바쳐진 양 같습니다.
분명 소비로 지역에 떨어지는 막대한 돈은 지역 사회 유력자의 정치력이 되고, 관광객 ‘수’는 관료가 일한 기분을 내기에 알맞은 재료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실체가 있을까요?
그 돈의 흐름은 꽤 직접적으로 자민당 정권의 지지 기반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 구조 속에서 관광업이 성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국가 주도의 관광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잘못이 아닐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보면 그 땅과 지역과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는 동선인 것 또한 분명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본래의 관광의 맥락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그 위에 설 수 있다면, 일본은 전 세계에서 걷잡을 수 없어진 대관광 시대의 너머를 제시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tourism과 sightseeing의 맥락에 서 있는 서구 세계(오늘날의 세계 관광업)에서는 이 발상이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관광이라는 말에 파고든 tourism과 sightseeing을 걷어 내야 합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유교의 영향 아래 있는 중국·한국·일본이지만, 유교를 가장 깊이 소화하고 승화해 온 일본에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광을 원래의 맥락으로 되돌려 소비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보아야 할까요?
여기서 다시 ‘나라의 빛을 보니, 왕의 손님이 되기에 이롭다’를 봅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빛’이란 현대의 풍경이나 명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그것이 tourism입니다). 한 나라의 ‘덕’이 내는 광채, 문물과 제도가 번성한 모습, 선정(善政)이 발하는 밝음을 가리킵니다. 덧붙이자면 ‘나라’를 일본으로 생각하지 않고 장소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단히 말해 관광이란 본래 어떤 나라에 가서 그 정치(마쓰리고토)의 광채를 보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손님이 되기에 이롭다’로 이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앞부분의 ‘나라의 빛을 본다’에서 끝난다면, 다른 나라 정치의 광채를 보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서구 자본주의적 소비의 맥락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는 사적인 만족으로 완결하는 것을 좋다고 하는 가르침이 하나도 없었고, 보고 들은 것을 스스로 살리는 실행의 기회가 반드시 요구되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거기까지를 통틀어 ‘하나의 배움’입니다. 자기가 만족하는 데서 끝난다면, 세상을 위해서도 사람을 위해서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왕의 손님이 되기에 이롭다’에는, 덕의 빛을 낼 만큼 잘 다스려진 나라라면 현자는 그곳에 머물며 왕의 빈객, 곧 관리로서 섬기는 것이 좋다는 함의가 있습니다.
이 생각이 유교 특유의 것이기에, 개인주의를 이상으로 삼는 서구 세계(특히 앵글로색슨권)에서는 혐오를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인이 아니고, 그들의 역사적 맥락을 거의 공유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와닿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 년 넘게 익숙해진 유교의 가르침이 몸과 마음 깊이 스며들어 마음을 깨웁니다.
관광이라는 말의 핵심에는 유교의 출처진퇴(出處進退) 사상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군주를 섬기고, 어느 나라에 몸을 둘 것인가. 그것을 정하기 위해 그 나라의 덕의 빛을 봅니다. 이것을 신유교라 불린 송대의 유학자 정이천(程伊川)과 주희(朱熹)는 ‘성덕광휘(盛德光輝)’, 곧 덕이 번성하여 빛난다고 읽었습니다.
섬길 만한 군주의 나라인지를 그 장소의 광채에서 간파하는 것. 그리고 그 광채는 덕이 내는 것. 이것이 관광의 본뜻입니다.
관광이란 한가로운 유람도, 자아 찾기의 장도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관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가 오면서 이 말은 구경 다니며 노는 뜻으로 바뀌어 뼈대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때 tourism의 층이 지배적이 되었고, 160년에 걸쳐 일본의 관광 정신을 파괴하는 동인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출처진퇴를 걸고 진심으로 다른 나라를 보겠다는 기백이 사라져 있고, 서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덕의 사상도 제거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거기를 바라보지 않는 한, 폭풍 같은 대관광 시대가 지나간 뒤에는 황무지만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