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 MAGAZINE 2026년 6월 30일
도에이 닌쿄 영화 『인생극장 히샤카쿠』|쓰루타 고지의 정(靜)과 다카쿠라 겐의 동(動)
찬바라의 무대가 텔레비전으로 옮겨 갔을 때 도에이가 새로운 틀로 찾아낸 것이 '닌쿄'였다. 전환점은 1963년의 『인생극장 히샤카쿠』. 전쟁 체험자인 쓰루타 고지가 '정(靜)'이라면 다카쿠라 겐은 '동(動)'이어서, 관객은 어느 쪽에도 자신의 울분을 맡길 수 있었다.
한때 영화계에는 스타라 불리던 화형(花形)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스타라는 말을 들어도 특정한 배우가 머릿속을 스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20세기 영화의 황금기에는 스타가 많은 관객을 매료했고, 그들의 인생과 마음에 깊이 새겨져 갔습니다.
스타는 단순한 겉모습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스크린에 반영되는 농도에서 비롯되며, 그 영상 세계를 보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시대의 요구를 일깨우고, 호응하고, 풀어 준다는 단 한 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말해지지 않는 시대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가, 여기가 스타와 그렇지 않은 배우의 갈림길입니다.
스타의 탄생과 밀접하게 얽힌 것이 시대 배경입니다. 전후 영화관 입장객 수가 끝없이 늘어 일본 영화계가 들뜬 가운데, 1958년 11억 명대로 정점에 이른 뒤에는 비탈을 구르듯 줄어들어 갔습니다. 원인은 텔레비전의 대두입니다.
그 이전의 일본 영화라고 하면 이른바 찬바라(칼싸움극)가 무수히 제작·상영되었지만, 찬바라의 표현 무대가 영화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 간 순간 영화관에 발걸음을 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안방에 누워 술을 마시며 가족이 단란하게 볼 수 있는 찬바라가 대두했습니다. 동시에 영화사를 이끌던 수뇌부는 구시대적 감성으로 경영을 이어 가려 한 탓에 시대와의 어긋남과 마찰이 커져 있었고, 시대극을 대신할 새로운 대들보가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대가 요구한 것은 공장처럼 양산할 수 있는 ‘틀(型)‘이었습니다. 틀만 만들 수 있다면 나머지는 대량 생산이 가능합니다. 여기에 텔레비전 대두기의 영화가 맞닥뜨린 현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는 양극화됩니다. 하나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만드는 대작 영화. 다른 하나는 편수를 중시하는 대량 생산 영화입니다.
그러나 대형사인 도호(東寶)·쇼치쿠(松竹)·다이에이(大映)는 자존심이 걸림돌이 되어 양산 영화로 키를 돌리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대작 영화에 특화한 도호가 독주했지만, 자금력을 키워 1969년 영화에 진출한 후지TV, 출판과 영상을 연동시킨 1976년의 가도카와 영화의 등장으로 영화 제작사들은 쇠락합니다.
한편 대량 생산 영화를 잘하는 제작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도에이(東映)입니다.
도에이는 찬바라 영화 쇠퇴로 큰 타격을 입은 회사 중 하나였지만, 대량 생산 영화라는 맥락에서는 누구보다 앞서 있었고, 어느 회사보다 체력 있는 제작진이 모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도에이의 영화 제작에 관여하던 사람 대부분은 전후 만주에서 돌아온 억센 거친 사내들이었고, 전쟁의 재해 등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도에이는 ‘하나의 가족’으로서 영화를 만들었고, 군대 방식을 영화에 적용한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불타 버린 들판, 패전, 동포와 가족의 죽음. 모든 것이 지워진 가운데 그들의 인생에 유일하게 남은 것, 그것이 도에이의 영화였습니다. 다시 말해 도에이는 단순한 영화 제작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이들에게 남은 유일한 삶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웬만한 일로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도에이의 열기이며, 대량 생산을 실현한 힘입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틀로서 도에이가 찾아낸 것이 ‘닌쿄(任俠)‘였습니다.
어느 세계에서든 시대의 전환점에는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도에이 닌쿄 영화의 경우, 그것은 1963년의 『인생극장 히샤카쿠(人生劇場 飛車角)』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한 두 배우가 도에이 황금기를 떠받치는 날개가 됩니다. 쓰루타 고지(鶴田浩二)와 다카쿠라 겐(高倉健)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끼어 괴로워하는 갈등, 반한 여자, 목숨을 버리는 싸움 등, 훗날 도에이가 틀로서 양산해 갈 닌쿄 영화의 양식은 첫 기념비적 작품에서 거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쓰루타 고지와 다카쿠라 겐을 나란히 놓으면 이 시대의 감성이 잘 이해됩니다.
쓰루타 고지는 다이쇼 13년(1924년) 생으로, 이른바 전중파의 그늘을 끌고 다니던 전쟁 체험자입니다. 해군 항공대에 속했고 스스로 특공대에 지원할 뜻을 품고 있었지만, 그대로 종전을 맞은 탓에 어찌할 수 없는 울분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표현하는 닌쿄는 조용하고, 배짱이 앉은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사라져 가는 것의 슬픔이 곧 쓰루타 고지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반해 다카쿠라 겐은 쇼와 6년(1931년) 생으로, 징병 경험이 없습니다. 쓰루타 고지의 대비로서, 도에이는 과묵하고, 견뎌 내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폭발하는 인내의 분노를 다카쿠라의 틀로서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이를테면 분기점이 되는 이 작품에서 쓰루타가 ‘정(靜)‘이라면 다카쿠라는 ‘동(動)‘이었고, 관객은 어느 쪽에도 자신의 울분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쓰루타파, 다카쿠라파로 시대의 스타가 갈리는 전환점이 생깁니다.
이후 닌쿄 영화는 시리즈화되어, 쓰루타 고지를 주연으로 하는 시리즈, 다카쿠라 겐을 축으로 한 시리즈,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후지 준코(藤純子)를 축으로 하는 시리즈가 전개되어 1970년대 전반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왜 닌쿄 영화가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하나의 사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관객의 출신입니다. 이미 부흥을 이루고 고도 경제 성장기에 들어선 시대를 살던 당시 젊은이들은 대부분 농촌 공동체에서 뜯겨 나와 익명의 도시에 내던져진 사정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의리도 인정도 통하지 않는, 돈과 계산만 도는 세계에 맨손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말로 할 수 없는 울분을 훌륭하게 포착해 승화한 것이 도에이 닌쿄 영화였습니다.
왜냐하면 도에이 닌쿄 영화는 바로 그 뒤집힌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의리와 인정이 아직 의미를 지니는 환상의 공동체를 스크린 위에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도에이 닌쿄 영화에서는 전통적인 협객의 일가와, 관헌이나 자본과 손잡고 폭력적으로 출세하는 신흥 야쿠자의 대비가 기본 구조입니다. 그 두 세계 사이에 낀 주인공은 부조리를 견디고, 의리를 위해 자신을 죽이며, 더는 견딜 수 없는 데 이르렀을 때, 스스로의 파멸을 알면서도 단 한 명, 혹은 두 명이 쳐들어갑니다.
이 마지막 쳐들어가는 장면이, 마침 1960년 안보투쟁에서 패배한 세대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집단의 정치로는 결말을 내지 못했습니다. 안보투쟁은 결국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의 강행 표결로 밀어붙여졌고, 정치의 계절은 패배로 막을 내렸으며, 그와 교대하듯 관료 출신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의 소득배증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리는 점점 풍요로워지는데, 그들의 마음 어딘가에는 진 것의 앙금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투쟁에서 진 그들은 답을 내지 못했지만, 그 답을 도에이가 닌쿄 영화를 통해 내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닌쿄 영화는 그 앙금 위에 핀 꽃이었습니다.
예전의 영화는 언제나 시대의 말해지지 않는 요구에 응하는 힘이 있었고, 확실한 열량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지금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말이 되지 못하는 울적함은 형태로 드러나지 않고, 범람하는 단발성 영상은 무수한 도피처를 줄 뿐입니다.
지금 새삼 도에이 닌쿄 영화를 다시 보는 의의. 거기에는 현대 일본을 만든 기층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디에 일그러짐을 안고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