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EMA 2400Vol.8

TM MAGAZINE 2026년 6월 16일

'은막(銀幕)'의 어원은 은과 알루미늄을 바른 스크린|우쓰시에와 활동변사

흰 천에 투영하기만 해서는 빛이 퍼져 상이 흐려진다. 그래서 알루미늄이나 은을 섞은 스크린이 쓰였고, 영어로 silver screen이라 불리며 번역어로 '은막'이 자리 잡았다. 일본에서는 우쓰시에의 잔영으로 활동변사의 이야기가 은막과 하나가 되었다.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으로 수많은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예전의 영화에는 특유의 색기가 있어 많은 사람을 마음속 깊이 매료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색기는 영상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상을 비추는 스크린 쪽에서 만들어진 마법인데, 거기에는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이 숨어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지나친 디지털을 되돌리려고 아날로그 레코드, 필름 카메라, 종이책 같은 ‘잃어버린 신체성’으로 회귀하고 있듯이, 예전에도 ‘잃어버린 무언가’를 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흔적이 ‘은막(銀幕)‘이라는 말입니다.

애초에 왜 ‘은(銀)‘일까요?
먼저 영화 탄생으로 이어지는 원류에는 환등(幻燈, 매직 랜턴)이 있었습니다. 2세기 중국에서 이미 생겨났다고도 하는 환등의 원리는 이윽고 근대 서구에서 발전하여, 에도 시대에 네덜란드 배를 통해 나가사키 데지마를 경유해 들어왔습니다.

『해체신서』로 알려진 난학의사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의 『난학사시(蘭學事始)』에도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신기한 물건으로 ‘토후르란테르네(네덜란드어로 환등을 뜻하는 toverlantaarn)‘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언제쯤 들어왔는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기계 자체는 18세기 후반께 난학이 융성하는 과정에서 일부에 알려져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19세기 초인 1801년, 화공 구마키치(熊吉)라는 인물이 우에노에서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환등을 우연히 구경했을 때 영화로 이어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구마키치는 환등에서 힌트를 얻어 ‘우쓰시에(寫し繪)‘라 이름 붙인 흥행을 시작해 가구라자카의 대여 공간에서 유료로 상영합니다. 당시 에도에서는 ‘우쓰시에’, 가미가타에서는 ‘니시키카게에(錦影繪)‘라 불렸는데, 뜻밖에도 이 뿌리가 일본 영화의 특수성과 맞닿게 됩니다.

우쓰시에란 나무로 된 휴대용 영사기로 유리 원판을 투영하고 이야기와 반주를 곁들여 보여 주는 흥행인데, 이미 ‘어두운 실내에 빛을 투영해 상을 맺게 하고, 이야기꾼과 음악이 붙는다’는 영화의 원형이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환등 시대부터 문제가 된 것이 광원입니다. 영화 초기에는 산수소염으로 생석회를 백열시키는 석회광(라임라이트) 방식이 채택되었고, 거기서 탄소 아크등이 영사기의 표준이 됩니다. 아크등의 등장으로 상당히 밝아졌지만, 흰 천에 투영하는 것만으로는 빛이 퍼져 버려 상이 흐릿하고 졸음을 부릅니다. 이 과제에 직면했을 때 기술자들은 영사기를 손보는 대신 스크린 쪽에서 광원의 반사 효율을 높이려 했고, 시행착오 끝에 알루미늄이나 은을 섞은 스크린(막)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알루미늄과 은이 빛을 튕겨 내는 금속 특성을 지녔기 때문인데, 이런 도료를 쓴 막은 영어로 실버 스크린(silver screen)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윽고 번역어로 ‘은막’이 자리 잡습니다. 다시 말해 은막이란 초기 영화 시대의 스크린 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어두운 광원을 보완하기 위한 기술적 궁리에서 시작된 말입니다.

영화 장치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1896~97년경입니다. 먼저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라는 장치가 1896년 당시의 국제항 고베에 수입되고, 이듬해 1897년에는 프랑스 뤼미에르사의 시네마토그래프와 에디슨 계열의 바이타스코프가 동시에 수입됩니다.
최초기의 영화 상영은 오사카와 교토, 아사쿠사의 극장을 전용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때 일본 쪽에서는 우쓰시에의 자취가 영화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영화가 자립한 시각 매체로 전환해 갔지만 일본에서는 활동변사(活動辯士)라 불리는 이야기꾼이 영화 체험의 중심에 눌러앉았습니다.

스크린 옆에 서서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고, 등장인물의 대사를 나누어 연기하며 정서를 부추깁니다. 당시 관객은 ‘어떤 영화를 볼까’만큼이나 ‘누구의 이야기로 볼까’를 따졌을 정도로, 일본에서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우쓰시에 시대의 이야기, 나아가 고단(講談)·라쿠고(落語)·가부키로 이어지는 구승적이고 일본적인 공연 문화는 일찌감치 은막이라는 신기술과 합류합니다.

광원이 막에 칠해진 은에 반사되어 환상적으로 빛나는 마법 같은 영상미와, 토착적인 이야기가 관객의 정감을 부추깁니다. 이 기술과 전통의 융합이 일본 고유의 영상 문화를 낳는 모태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 ‘은막’이라는 말이 단순한 영상 기술 용어가 아니라 정서 그 자체이며, 환등에서 시작된 오래되고 좋은 영화의 기억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기억에는 무성영화 시대 활동변사의 존재가 얽혀 있습니다.
즉 어둠 속에서 영사기가 투영하는 은막에 이야기와 반주가 라이브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은막의 기억’이며, 그 뒤에도 일본 영화의 정신적 잔재가 되어 갑니다.

그러나 1931년 영화 기술사에 커다란 단층이 생겨 큰 사회적 저항에 이릅니다. 바로 토키(발성영화)로의 이행입니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토키는 1931년 고쇼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의 『마담과 아내(マダムと女房)』인데, 이 전환은 활동변사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기술적 전환점이었기에 쟁의와 파업이 잇따릅니다.
그 결과 서구에서는 무성영화에서 토키로 매끄럽게 전환했지만, 일본에서는 토키의 보급이 한동안 억제되어 무성영화와 토키가 병존하는 기간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무성영화와 토키의 공존이라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본의 영화 환경은, 전후에 활약하는 젊은 영화인들에게 강렬한 원체험을 안겼습니다. 소년 시절 은막만의 매력에 사로잡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영화관에 드나든 사람들이 훗날 영화사에 이름을 새겼듯이, 은막은 단순한 영화 체험을 초월해 그야말로 일본과 서양 문화가 뒤섞이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은막 자체는 1930년대 시점에 이미 흰 매트 스크린으로 대체가 진행되어 지나간 기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막 특유의 정감에 마음이 움직인 영화의 원체험을 지닌 사람들은 195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에 들어서자 ‘은막’이라는 말을 향수의 어휘로 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점령 아래 대소비 문화 시대를 맞은 일본인이 전전의 정감을 찾아 영화의 원체험을 투영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기술적으로는 은빛 반사막이 이미 지난 유물이던 시대에 ‘은막의 스타’나 ‘은막의 여왕’이라는 말이 자립하여, 이윽고 일본 영화라는 매체 전체를 가리키는 아름다운 환유가 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선진국 사람들이 디지털 이전(1990년대 이전)을 찾듯이, 당시 일본인에게는 미국 이전(1945년 이전)의 일본적 정감으로의 회귀였습니다.

물질로서의 은이 소임을 마침과 동시에 말로서 빛을 더해 간 ‘은막’. 이 정감이야말로 일본 영화의 밑바닥에 흐르는 혈통일지도 모릅니다.

사상가 미쓰이 다카히로의 주간 에세이 Project 2049

영어로, 매주 금요일 오후 5시(일본 시간). 좋아요도 댓글도 순위도 없습니다. 에세이와 당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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