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숲Vol.27

TM MAGAZINE 2026년 10월 27일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다|지식과 기술은 수단일 뿐이다

메이지 이후 160년, 수단이었을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 목적이 되어 버려 사람은 사는 의미를 잃었다. 왕양명은 『전습록』에서 성인의 학문이란 누구나 지닌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라 설했다. 지식과 기술은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지식과 기술의 축적이 절대적이던 시대.

돌이켜 보면 메이지 이후 160년의 역사에서 그것은 지위를 얻고, 커리어를 안정시키고, 더 나은 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합리적인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덧없는 존재여서, 좋든 나쁘든 무슨 일이든 만성이 되면 도리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수단은 어느새 목적이 되고, 목적으로 바뀐 지식과 기술의 습득은 한 사람의 삶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잃고 헤매며, 시대의 조류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혼란으로 귀결됩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이 바로 이런 시대이고 이런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놓치고, 기존의 가치관에 매달릴 수도 없으며, 어디에 앞길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분명 인류사 최대의 전환점이라 불리는 여러 현상이 있겠지만, 꼭 거기서만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보았을 때, 제게는 이것이 메이지 이후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가 한계를 맞았다는 마지막 신호로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떠들썩한 여러 문제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선인들은 이런 때에 어떻게 살았는가, 거기서 실마리를 찾는 일입니다.

실제로 일본사를 돌아보아도 혼미의 시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잃는 일은 몇 번이나 일어났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절망적인 세상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 바꿔 부르며 종말을 떠들었고, 더 향락적으로, 더 즉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인생은 보답받았을까요. 선인들이 역사로 전하듯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기술이라는 근대의 골격 자체가 무효가 된 지금,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우는 것이 인간에게 더 나은 미래로 이어질까요.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왕양명(王陽明)에서 비롯된 일본의 양명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그중에서도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 선생의 사상에 강렬한 영향을 받아 날마다 마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왕양명의 『전습록(傳習錄)』에 적힌 한 구절에 바로 이 시대의 혼미 너머를 말하는 말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유학에서 성인의 학문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잘못된 개념으로 이해되어 온 데 대해 왕양명이 한 말입니다.

먼저 송대 이후 주희(朱熹)를 바탕으로 한 주자학(朱子學)에서는 공자 같은 성인을 지식과 기술이 뛰어난 신과 같은 존재로 떠받들고, 그것을 자신들의 바깥에 지리(支離)시켜 두었습니다. 여기서 이원론이 관계로 굳어지고, 배우는 사람은 그곳을 향해 바깥의 지식과 기술을 익혀 성인과 같은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배웠습니다.

당시 중국 유학의 교육 기관은 이 구조를 토대로 삼았기에, 나이마다 성인을 향한 계단이 놓였고, 각 단계에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소화하고 익힌 뒤에 사회로 나간다는 일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통치는 어지러워지고, 사람의 마음은 어지러워졌으며, 전쟁에 전쟁이 이어지고, 혼란은 극에 달해 사람들은 삶의 의미도 목적도 잃었습니다.

이에 대해 명대의 왕양명은, 종래 말해져 온 성인의 학문이 잘못된 관점에서 설정되었기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고 간명하게 말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근본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 이 한 가지에 다합니다. 즉 지식과 기술이 성인의 학문의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성인의 학문이란 누구나 늘 지니고 있는 공통의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학문이 있고, 가르침이 있고, 배움이 있다. 왕양명은 그렇게 설했습니다.

사람에게 적성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 적성을 어떻게 살릴지 생각할 때 많은 사람이 전도(顚倒)되고 맙니다. 즉 주자학적인 지반(地盤)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적성을 사회에 환원하고, 지식과 기술을 바깥에 둔 채 판단 기준을 밖에 세우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적성에 맞는 지식과 기술의 습득은 분명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당사자가 자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단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다, 남보다 위에 서서 남을 내려다보고 싶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익히는 것은, 마음의 본체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에서 학문이 아닙니다. 고학력 숭배가 사상누각이었음이 드러난 지금, 진짜 학문을 구하는 목소리는 서서히 높아질 것입니다.

오히려 지식과 기술이란 마음의 본체, 곧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입니다. 목적은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 그 경지에서 사는 것. 이것이 성인의 가르침입니다.

근대 이후, 그리고 지금도 이 전도된 생각이 만연해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끝에서 모두가 혼미를 극하고, 무엇이든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자신이 애초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인 가운데, 도대체 어떻게 국가와 사회와 세계와 인류를 좋게 만들겠다는 것일까요.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이 점은 묻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세계는 사람을 버리려는 듯 맹렬하게 계속 가속하고 있고, 떨려 나가는 사람은 날마다 엄청난 수에 이릅니다. 지금 다시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생존과 직결되는데, 그것은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사상가 미쓰이 다카히로의 주간 에세이 Project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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